지난주에 내린 눈이 채 녹지 않고 관목 위에 웅크려 있었다. 며칠 사이 녹았다 얼기를 반복한 눈덩이는 눈이라기 보단 희고 커다란 얼음덩이에 가까웠다. 힘을 주어 겨우 눈덩이를 한 움큼 크게 떼어낸 손끝이 얼어 온통 붉은 색이었다.
손가락 끝까지 살이 빠져 전보다 더 커 보이는 손으로 눈덩이를 쥔 요한은 검은 차에 비친 제 얼굴을 보다 부은 눈가와 뺨에 차례로 눈덩이를 문질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눈에 비해 관목 위의 눈은 잔돌이나 가지 때문에 상처 날 일이 적다는 것을 그는 이제 경험적으로 안다. 빨개진 손끝보다 눈두덩과 뺨이 더 붉어질 때까지 눈덩이를 문지르자 눈에 띄게 부었던 자리가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눈가를 손으로 슥슥 문질러 본다. 얼얼한 아픔이 상처 때문인지 살 아래까지 얼은 탓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도 부은 얼굴을 보고 말을 걸어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한은 매번 부질없는 짓을 했다. 그건 이제 습관에 가까운 일이었다.
키패드가 얼고 젖은 손을 인식하지 않는 통에 요한은 현관문 앞에서 약간 시간을 허비했다. 마침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단박 따뜻한 기운이 코앞까지 밀려오다 찬 공기에 금세 흩어진다. 예능 프로그램이라도 켜져 있는지 응접실에서 녹음된 웃음소리가 났다.
“다녀왔습니다!”
그는 부러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아무도 살갑게 받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부엌에서 과일을 깎던 어머니가 한 번 그를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누구도 그의 상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형 보고 싶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요한은 문득 생각했다. 등 뒤로 방문을 닫으며 생각도 같이 마음속으로 꽁꽁 감춰버린다.
덜컥 겁이 났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아침에 운동을 하지 않은 지 한 달 정도가 지났는데 요한은 여전히 새벽같이 눈을 떴다. 밤사이 차게 식은 공기에 몸을 웅크리자 옆구리에 끼어 자고 있던 복음이가 불만스런 소리를 냈다.
“…….”
한참 말없이 복음이의 등만 쓰다듬고 있던 요한이 이불 안쪽으로 고개를 묻었다. 복음이 냄새. 멍든 자리가 이불에 쓸렸는지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학교 가기 싫어.”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웅얼거린 요한은 마치 누군가 소리라도 지른 것처럼 얼른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이불 안에 요한과 함께 갇힌 것이 답답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복음이가 길게 기지개를 폈다. 앞으로 두 발자국 걸어온 고양이는 요한의 얼굴에 한 번 제 이마를 부비고는 가볍게 이불에서 빠져나갔다.
복음이가 나간 자리가 체온에 눌려 뜨끈했다. 요한은 그 자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잠시 동안 자리에서 뭉그적거렸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 요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운 내야지. 내가 생각하기에 달렸어.
나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도 많아.
상담 선생님이, 코치님이, 부모님이 해 준 말들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요한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세수를 하고 돌아와 학교 갈 준비를 하며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약통에서 남은 약 수를 헤아렸다. 다음 주 즈음에는 또 약을 받으러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수영복과 수영모자, 그 외에 수영을 하면서 썼던 모든 물건들을 정리해서 버린 것이 삼 주가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요한은 보충수업이 끝나면 종종 학교 수영장에 갔다.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라기 보단 습관에 가까운 행위였다. 점심을 먹고, 약을 먹고, 멍하게 가방을 챙기고. 정신을 차려 보면 그는 수영장 앞에 있었다.
애들이 싫어하는데. 집에 가야지.
가까스로 문 앞에서 정신을 차린 요한이 스스로의 뺨을 얍, 때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씨발. 고요한. 존나 말귀 못 알아 처먹네?”
가방을 멘 어깨가 눈에 띄게 치솟았다. 얼른 뒤로 돌아본 요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앞에 선 수영부원들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아는 얼굴들이었다.
“너 여기 오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냐? 존나 처맞은 게 그저께인데 대가리에 든 거 없어? 말귀 못 알아들어?”
“아, 어, 아냐. 집에 갈 거야. 미안해….”
당황하면 으레 그렇듯 손짓이 커진다. 씨발, 너 이제 수영도 그만뒀다며. 요한이 말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니면 그냥 맞는 게 좋냐? 이제 하루라도 안 맞으면 좀 좀이 쑤셔? 남자 좋아하더니 맞는 것도 좋아하냐. 그거 뭐라고 하지? 마조, 새끼야. 아. 맞다. 왁자한 말소리가 머리 위를 빠르게 날아다녔다. 숨이 가쁘다.
“깜박했어, 갈 거야. 이제 집에 갈게. 연습 열심히… 헉,”
배로 묵직한 아픔이 왔다. 아픔에 말이 끊긴 요한이 배를 쥐어잡고 웅크렸다. 그렇게 맞는 게 좋으면 맞아야지.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이름부터 떠올랐지만 요한은 상대를 부르려던 입술을 얼른 잡아 물었다. 이름을 불러 봐야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가슴팍을 걷어찼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가리던 손목이 붙잡히고 나자 수영장 안쪽으로 질질 끌려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체육관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안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들을 전부 묻어 버릴 만큼 큰 소리였다.
요한이 수현의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막 오늘치 약을 먹을지 말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약을 먹으면 으레 30분 안에 잠이 쏟아졌으므로, 요한은 약을 먹기 전에 핸드폰이 제 옆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나올 수 있어? 그는 고민하지 않고 응, 하고 답장을 했다. 어차피 주말이었다. 적어도 내일까지는 부모님이 오지 않을 테니 늦게 들어온다고 해도 아무도 화내지 않겠지.
- 공원 앞으로 와.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는 해도 말씀드리지 않고 마음대로 밤늦게 나가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요한은 얼른 알겠다고 답장했다. 용서해주세요. 머릿속으로 기도를 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복음이에게 갔다올게, 하고 인사를 했다.
애웅.
복음이가 짧게 울었다. 어차피 이제 요한에게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는 사람은 복음이 뿐이었다. 집 안에 누가 남아 있건 언제나 그랬다.
공원을 가로질러 약속장소로 가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입구에 세워진 눈에 익은 차량과 그 앞에 선 사람을 발견한 요한은 거의 뛰다시피 하여 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갔다. 수현이 형! 이름을 부르자 대답마냥 빨간 불씨가 일었다. 추운데, 기다렸나보다. 미안해, 얼른 사과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요한은 수현의 시선이 자신의 눈두덩과 입가에 평소보다 조금 오래 머무는 것을 눈치 챘다.
“아, 이거? 또 넘어졌지 뭐야. 헤헤.”
요즘 자주 덤벙대는 거 같아.
거짓말은 몇 번을 해도 할 때마다 가슴이 따꼼따꼼 아프다. 내린 시선 안에 배배 꼬인 제 손가락이 내려다보였다. 고개 숙이고 있으면 금방 거짓말인 걸 들킬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들고 헤헤 웃어보였다.
“타. 추우니까.”
다른 말 대신 뒷좌석 문을 열고 먼저 올라타는 수현을 보고 요한은 내심 안도했다. 따뜻한 차 안 공기에 얼굴이 녹은 것을 느낄 틈도 없이 수현이 저를 무릎 위로 올려 안는 통에 요한은 조금 버둥거리며 으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형, 형, 누가 봐…. 나 무거워.”
내려오려 바르작거려도 수현은 좀처럼 팔을 풀어주지 않았다. 힘을 쓰면 못 풀 것도 없을 테지만 요한은 여전히 힘쓰는 데까지 생각을 뻗지 못했다. 팔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내려놓은 요한의 목덜미에 조금 차가운 뺨이 닿고 얕은 날숨이 닿았다. 찬 데 있다 갑자기 열이 오른 귓바퀴가 간질거렸다.
“형, 간지러워…. 진짜 누가 보면 어떡해, 응?”
몸을 움츠리고, 창밖으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그래도 어정쩡하게 뒀던 팔을 올려 슬그머니 수현을 마주 안는다. 그건 꽤 오랜 학습의 결과였다.
“요한아.”
가만히 부르는 목소리는 스멀스멀 피는 불안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었다. 응,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을 하자 수현이 가볍게 웃었다. 왜 웃지. 나 또 바보 같은 소리 냈나. 자신이 아까까지 무슨 소리를 내었는지 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으려니 입술 위에 수현의 입술이 닿는다.
“…….”
상처 위로 겹쳐진 입술에 피가 터져 묻으면 어떡하지. 걱정 어린 눈이 세 번 깜박였다. 쿵쾅. 심장 뛰는 소리가 형한테도 들리면 어떡하지. 눈을 감으면 제 감정이 감춰지기라도 할 것처럼 요한은 한 번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돌려서 말하는데 재주 없으니까 그냥 말할게.”
시합 직전에도 이렇게 떨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을 때처럼 심장이 쿵쾅 빠르게 뛰었다. 요한은 시합 전에 했던 것처럼 크게 심호흡을 했다. 조금 가라앉았나 싶던 심박은 시선이 얽히자 다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쿵쾅. 쿵쾅. 차 밖에서도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요한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내 곁에 있어줄래.”
눈앞에 툭 떨어진 말을 한아름 받아든 요한은 눈을 네 번 깜박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장난 기계처럼 눈만 깜박이며 한참을 멍하게 수현을 바라보던 요한은, 약 2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으에?”
라고 했다.
귀에 들린 말이 머릿속으로 흘러가 인식으로 전환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수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받아들이기까지도. 이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가 간지러웠다. 수현을 안고 있던 –정확히는 잡고 있는 것에 가까웠던- 손으로 귀를 문지르자 귀가 터질 듯이 뜨거웠다.
귓가의 열기는 한 번 자각하고 나자 순식간에 얼굴을 타고 올라 목까지 흘러내렸다. 어두운 와중에도 요한의 얼굴이, 귀가, 목이 새빨개진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요한은 귀를 문지르던 손을 내려 수현의 옷깃을 꾹 잡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차 안은 따뜻했음에도 불구하고, 코트깃에선 여전히 찬 냄새가 났다.
얼굴을 감춘 채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요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여러 번. 자기도 몇 번인지 잊어버렸을 만큼 여러 번.
“아무 데도 안 갈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조금 끝이 잠겨 있었다. 요한은 감정에 솔직한 만큼 제 감정을 정확한 단어로 짚어 전달하는 데에 취약했지만 지금 느끼는 기분만은 한 단어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 나 아주 벅차. 그리고 조금 무섭기도 해.
있잖아, 형. 나는 매일 형이 보고 싶었어.
친구들이 화를 낼 때에도, 부모님이 속상한 눈으로 볼 때에도, 상담 선생님에게 노력하지 않는다고 혼이 났을 때에도. 집에 혼자 있을 때에도. 약을 멀고 몽롱해진 정신으로 잠이 들기 직전까지도. 나는 항상, 항상 형이 보고 싶었어.
코끝이 찡하게 아렸다. 왠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근 일 년 사이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는데도 그랬다.
형이라면 나한테 뭘 해도 괜찮아. 아프게 해도, 힘들게 해도, 괴롭게 해도, 뭐든지 괜찮아. 옆에 있게 해줘. 형이 주는 게 무엇이든 전부 받을게.
옆에 있어줘. 날 버리지 말아줘.
좋아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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