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lways.

2017. 1. 31. 23:23 from 1차


 

 

 

지난주에 내린 눈이 채 녹지 않고 관목 위에 웅크려 있었다. 며칠 사이 녹았다 얼기를 반복한 눈덩이는 눈이라기 보단 희고 커다란 얼음덩이에 가까웠다. 힘을 주어 겨우 눈덩이를 한 움큼 크게 떼어낸 손끝이 얼어 온통 붉은 색이었다.

손가락 끝까지 살이 빠져 전보다 더 커 보이는 손으로 눈덩이를 쥔 요한은 검은 차에 비친 제 얼굴을 보다 부은 눈가와 뺨에 차례로 눈덩이를 문질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눈에 비해 관목 위의 눈은 잔돌이나 가지 때문에 상처 날 일이 적다는 것을 그는 이제 경험적으로 안다. 빨개진 손끝보다 눈두덩과 뺨이 더 붉어질 때까지 눈덩이를 문지르자 눈에 띄게 부었던 자리가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눈가를 손으로 슥슥 문질러 본다. 얼얼한 아픔이 상처 때문인지 살 아래까지 얼은 탓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도 부은 얼굴을 보고 말을 걸어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한은 매번 부질없는 짓을 했다. 그건 이제 습관에 가까운 일이었다.

키패드가 얼고 젖은 손을 인식하지 않는 통에 요한은 현관문 앞에서 약간 시간을 허비했다. 마침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단박 따뜻한 기운이 코앞까지 밀려오다 찬 공기에 금세 흩어진다. 예능 프로그램이라도 켜져 있는지 응접실에서 녹음된 웃음소리가 났다.

다녀왔습니다!”

그는 부러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아무도 살갑게 받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부엌에서 과일을 깎던 어머니가 한 번 그를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누구도 그의 상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형 보고 싶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요한은 문득 생각했다. 등 뒤로 방문을 닫으며 생각도 같이 마음속으로 꽁꽁 감춰버린다.

덜컥 겁이 났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아침에 운동을 하지 않은 지 한 달 정도가 지났는데 요한은 여전히 새벽같이 눈을 떴다. 밤사이 차게 식은 공기에 몸을 웅크리자 옆구리에 끼어 자고 있던 복음이가 불만스런 소리를 냈다.

…….”

한참 말없이 복음이의 등만 쓰다듬고 있던 요한이 이불 안쪽으로 고개를 묻었다. 복음이 냄새. 멍든 자리가 이불에 쓸렸는지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학교 가기 싫어.”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웅얼거린 요한은 마치 누군가 소리라도 지른 것처럼 얼른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이불 안에 요한과 함께 갇힌 것이 답답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복음이가 길게 기지개를 폈다. 앞으로 두 발자국 걸어온 고양이는 요한의 얼굴에 한 번 제 이마를 부비고는 가볍게 이불에서 빠져나갔다.

복음이가 나간 자리가 체온에 눌려 뜨끈했다. 요한은 그 자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잠시 동안 자리에서 뭉그적거렸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 요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운 내야지. 내가 생각하기에 달렸어.

나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도 많아.

상담 선생님이, 코치님이, 부모님이 해 준 말들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요한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세수를 하고 돌아와 학교 갈 준비를 하며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약통에서 남은 약 수를 헤아렸다. 다음 주 즈음에는 또 약을 받으러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수영복과 수영모자, 그 외에 수영을 하면서 썼던 모든 물건들을 정리해서 버린 것이 삼 주가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요한은 보충수업이 끝나면 종종 학교 수영장에 갔다.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라기 보단 습관에 가까운 행위였다. 점심을 먹고, 약을 먹고, 멍하게 가방을 챙기고. 정신을 차려 보면 그는 수영장 앞에 있었다.

애들이 싫어하는데. 집에 가야지.

가까스로 문 앞에서 정신을 차린 요한이 스스로의 뺨을 얍, 때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 씨발. 고요한. 존나 말귀 못 알아 처먹네?”

가방을 멘 어깨가 눈에 띄게 치솟았다. 얼른 뒤로 돌아본 요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앞에 선 수영부원들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아는 얼굴들이었다.

너 여기 오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냐? 존나 처맞은 게 그저께인데 대가리에 든 거 없어? 말귀 못 알아들어?”

, , 아냐. 집에 갈 거야. 미안해.”

당황하면 으레 그렇듯 손짓이 커진다. 씨발, 너 이제 수영도 그만뒀다며. 요한이 말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니면 그냥 맞는 게 좋냐? 이제 하루라도 안 맞으면 좀 좀이 쑤셔? 남자 좋아하더니 맞는 것도 좋아하냐. 그거 뭐라고 하지? 마조, 새끼야. . 맞다. 왁자한 말소리가 머리 위를 빠르게 날아다녔다. 숨이 가쁘다.

깜박했어, 갈 거야. 이제 집에 갈게. 연습 열심히,”

배로 묵직한 아픔이 왔다. 아픔에 말이 끊긴 요한이 배를 쥐어잡고 웅크렸다. 그렇게 맞는 게 좋으면 맞아야지.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이름부터 떠올랐지만 요한은 상대를 부르려던 입술을 얼른 잡아 물었다. 이름을 불러 봐야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가슴팍을 걷어찼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가리던 손목이 붙잡히고 나자 수영장 안쪽으로 질질 끌려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체육관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안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들을 전부 묻어 버릴 만큼 큰 소리였다.

 

 

 

 

 

 

 

요한이 수현의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막 오늘치 약을 먹을지 말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약을 먹으면 으레 30분 안에 잠이 쏟아졌으므로, 요한은 약을 먹기 전에 핸드폰이 제 옆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나올 수 있어? 그는 고민하지 않고 응, 하고 답장을 했다. 어차피 주말이었다. 적어도 내일까지는 부모님이 오지 않을 테니 늦게 들어온다고 해도 아무도 화내지 않겠지.

- 공원 앞으로 와.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는 해도 말씀드리지 않고 마음대로 밤늦게 나가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요한은 얼른 알겠다고 답장했다. 용서해주세요. 머릿속으로 기도를 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복음이에게 갔다올게, 하고 인사를 했다.

애웅.

복음이가 짧게 울었다. 어차피 이제 요한에게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는 사람은 복음이 뿐이었다. 집 안에 누가 남아 있건 언제나 그랬다.

 

 

 

 

 

 

공원을 가로질러 약속장소로 가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입구에 세워진 눈에 익은 차량과 그 앞에 선 사람을 발견한 요한은 거의 뛰다시피 하여 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갔다. 수현이 형! 이름을 부르자 대답마냥 빨간 불씨가 일었다. 추운데, 기다렸나보다. 미안해, 얼른 사과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요한은 수현의 시선이 자신의 눈두덩과 입가에 평소보다 조금 오래 머무는 것을 눈치 챘다.

, 이거? 또 넘어졌지 뭐야. 헤헤.”

요즘 자주 덤벙대는 거 같아.

거짓말은 몇 번을 해도 할 때마다 가슴이 따꼼따꼼 아프다. 내린 시선 안에 배배 꼬인 제 손가락이 내려다보였다. 고개 숙이고 있으면 금방 거짓말인 걸 들킬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들고 헤헤 웃어보였다.

. 추우니까.”

다른 말 대신 뒷좌석 문을 열고 먼저 올라타는 수현을 보고 요한은 내심 안도했다. 따뜻한 차 안 공기에 얼굴이 녹은 것을 느낄 틈도 없이 수현이 저를 무릎 위로 올려 안는 통에 요한은 조금 버둥거리며 으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 , 누가 봐. 나 무거워.”

내려오려 바르작거려도 수현은 좀처럼 팔을 풀어주지 않았다. 힘을 쓰면 못 풀 것도 없을 테지만 요한은 여전히 힘쓰는 데까지 생각을 뻗지 못했다. 팔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내려놓은 요한의 목덜미에 조금 차가운 뺨이 닿고 얕은 날숨이 닿았다. 찬 데 있다 갑자기 열이 오른 귓바퀴가 간질거렸다.

, 간지러워. 진짜 누가 보면 어떡해, ?”

몸을 움츠리고, 창밖으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그래도 어정쩡하게 뒀던 팔을 올려 슬그머니 수현을 마주 안는다. 그건 꽤 오랜 학습의 결과였다.

요한아.”

가만히 부르는 목소리는 스멀스멀 피는 불안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었다. ,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을 하자 수현이 가볍게 웃었다. 왜 웃지. 나 또 바보 같은 소리 냈나. 자신이 아까까지 무슨 소리를 내었는지 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으려니 입술 위에 수현의 입술이 닿는다.

…….”

상처 위로 겹쳐진 입술에 피가 터져 묻으면 어떡하지. 걱정 어린 눈이 세 번 깜박였다. 쿵쾅. 심장 뛰는 소리가 형한테도 들리면 어떡하지. 눈을 감으면 제 감정이 감춰지기라도 할 것처럼 요한은 한 번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돌려서 말하는데 재주 없으니까 그냥 말할게.”

시합 직전에도 이렇게 떨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을 때처럼 심장이 쿵쾅 빠르게 뛰었다. 요한은 시합 전에 했던 것처럼 크게 심호흡을 했다. 조금 가라앉았나 싶던 심박은 시선이 얽히자 다시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쿵쾅. 쿵쾅. 차 밖에서도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요한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내 곁에 있어줄래.”

눈앞에 툭 떨어진 말을 한아름 받아든 요한은 눈을 네 번 깜박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장난 기계처럼 눈만 깜박이며 한참을 멍하게 수현을 바라보던 요한은, 2초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으에?”

라고 했다.

귀에 들린 말이 머릿속으로 흘러가 인식으로 전환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수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받아들이기까지도. 이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가 간지러웠다. 수현을 안고 있던 정확히는 잡고 있는 것에 가까웠던- 손으로 귀를 문지르자 귀가 터질 듯이 뜨거웠다.

귓가의 열기는 한 번 자각하고 나자 순식간에 얼굴을 타고 올라 목까지 흘러내렸다. 어두운 와중에도 요한의 얼굴이, 귀가, 목이 새빨개진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요한은 귀를 문지르던 손을 내려 수현의 옷깃을 꾹 잡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차 안은 따뜻했음에도 불구하고, 코트깃에선 여전히 찬 냄새가 났다.

얼굴을 감춘 채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요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여러 번. 자기도 몇 번인지 잊어버렸을 만큼 여러 번.

아무 데도 안 갈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조금 끝이 잠겨 있었다. 요한은 감정에 솔직한 만큼 제 감정을 정확한 단어로 짚어 전달하는 데에 취약했지만 지금 느끼는 기분만은 한 단어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 아주 벅차. 그리고 조금 무섭기도 해.

있잖아, . 나는 매일 형이 보고 싶었어.

친구들이 화를 낼 때에도, 부모님이 속상한 눈으로 볼 때에도, 상담 선생님에게 노력하지 않는다고 혼이 났을 때에도. 집에 혼자 있을 때에도. 약을 멀고 몽롱해진 정신으로 잠이 들기 직전까지도. 나는 항상, 항상 형이 보고 싶었어.

코끝이 찡하게 아렸다. 왠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근 일 년 사이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는데도 그랬다.

 

형이라면 나한테 뭘 해도 괜찮아. 아프게 해도, 힘들게 해도, 괴롭게 해도, 뭐든지 괜찮아. 옆에 있게 해줘. 형이 주는 게 무엇이든 전부 받을게.

옆에 있어줘. 날 버리지 말아줘.

 

좋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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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ㅅ신 :

* At the Skyfall

2016. 12. 4. 01:32 from 1차





 

 

 

오래 써 왔던 방의 구조를 바꾸었다. 문이 열리는 방향을 바꾸고, 방 안의 가구를 모조리 꺼내고. 텅 빈 방을 매트리스로 채웠다. 프롤로의 침실은 이제 누가 얼마나 굴러도 떨어질 일 없는 거대한 침대가 되었다.

- 버리려고 줬구나, 선물.

- 그런 것 같나?

- 하긴. 정 붙이기 싫어서 이름도 안 부르는 새끼에게 내가 뭘 바래.

어린 눈에 그렁하게 고였던 눈물을 기억한다. 제 것과 달리 선이 가늘고 예쁘장한 얼굴도. 눈물을 참는지 벌개진 눈가는 저를 노려보며 죽여 달라고 말하던 것과 같은 눈이었다. 그는 속눈썹 끝까지 매달린 눈물이 용케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넌 진짜 창의적인 개새끼야. 그래, 나도 사랑해. 으레 내뱉는 말끝에 씨근거리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 그놈의 빌어먹을 사랑타령 좀 안 하면 안 돼?

상대가 토해내는 목소리는 하나도 날카롭지 않았다. 도리어 물기가 어려 아주 뭉툭하고 서툴기 짝이 없다. 그런 목소리로는 무슨 비난을 해도 먹히지 않을 텐데. 그는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 그럼 뭐라고 할까.

했다.

상대는 한참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기어이 떨어진 눈물이 툭툭 떨어져 침대에 동그란 모양을 남겨 놓았다. 상대는 으레 그렇듯 애꿎은 입술을 짓씹었다. 주인 잘못 만나 고생이 많군. 그는 또 여상스런 생각을 했다.

- 아니야, 그래. 사랑한다고 해. 아무것도 안 담겨 있어도 좋으니까. 그냥 그래.

그는 문득 아주 어릴 적 처음으로 만들었던 찰흙 인형을 떠올린다. 아무리 몇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어도 엉성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의 공예품. 그건 차마 공예라고 부르기도 힘들 만큼 어설픈 모양새였고, 표면 여기저기에 얼룩덜룩한 지문이 잔뜩 묻어 있었다. 서툴렀다는 뜻이다. 눈앞에 툭 떨어진 상대의 감정이 꼭 그러했다.

 

 

 

 

누군가와 오랫동안 진득한 연애를 한 것이 언제인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자신이 몇 명이나 되는 사람과 사귀었는지도. 첫사랑이 누구였더라. 대학 때 처음으로 차였던 때는 기억이 난다. 수많은 연애의 기억을 놔두고 차였던 연애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우스웠다.

프롤로보다 두 살이 많았던 선배는 그를 카페로 불러내어, ‘나 임신했다.’ 라고 했다.

- ?

- 임신했다고.

사람이 너무 놀라면 머릿속이 새하얘진다고 하더니. 컵을 다시 잡으려고 뻗었던 손을 허공에 정지시킨 채, 저는 꽤 멍청한 얼굴로 선배를 바라봤던 것 같다.

- 헤어지자.

- ?

그녀는 망설임 한 번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책임져, 개새끼야, 어떻게 할 거야, 지울 거야. 예상하고 있던 말들 중 어느 하나도 아닌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던 것도 같고. 그녀와의 연애는 하나도 기억나는 바가 없었지만 프롤로는 그 순간만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했다.

- 왜입니까.

- 너랑 애 키울 마음 없어. 이것 봐, 알렉. 넌 아주 매력적이고 괜찮은 남자지만, 솔직해지자고. 넌 뭔가에 애착을 갖질 못하잖아? 정착도 못 하고.

- …….

- 넌 섹스하기엔 좋은 상대일지 몰라도 함께하기엔 최악의 상대야, 알렉상드르.

그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어쩜 이렇게 제 주변에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만 모였는지. 그는 담배를 물고, 한 번 길게 뱉어냈다가, 그대로 담배를 떨어트려 구둣발로 짓이겼다.

꼬마를 죽이기로 약속한 날이 내일이었다. 달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크고 둥글었고, 언젠가 영화에서 지껄이던 대사대로 보름달은 사람을 자지 못하게 했다.

 

 

 

 

 

 

그 날은, 정확히 그가 예상했던 대로, 구름 한 점 없이 날이 맑았다. 공기가 깨끗하다는 것이 코끝으로 느껴지는 날이었다. 바다를 마주한 절벽에서는 짠 냄새가 났고, 꼬마를 안고 오른 절벽 위쪽에서는 찹찹한 풀 냄새가 났다.

 

This is the end.

 

그는 언젠가 들었던 노래의 가사를 떠올린다. 그래. 이게 끝이지. 숨을 참고, 열까지 세고. 땅이 움직이는 걸 느껴. 그 다음엔.

그 다음엔?

그는 손을 뻗어 상대의 목을 쥔다. 손바닥 아래서 팔딱이는 맥을 느낀다. 그는 상대의 위로 고개를 숙여, 그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목을 틀어쥐었던 손이 미끄러져 풀밭을 짚었다. 피를 말끔히 닦아낸 입술 위로 남자의 입술이 오래 머물렀다. 비스듬히 닿은 코끝으로 가는 숨이 섞였다. 혀 한 번, 타액 한 번 섞이지 않은 아주 담백한 입맞춤 끝에 프롤로는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현아.”

선우 현.

- 왜 이름으로 안 부르는 거야?

- 정이 드니까.

부질없기 짝이 없는 짓이다. 선배의 말마따나 저는 함께하기엔 최악의 상대였고, 고작 스무 살이 되었을까 말까 한 꼬마의 앞길을 막는 것도 못 할 짓이다 싶지만, 그는 이내 그런 생각조차 의미 없다는 생각을 했다. 위선적이지. 팔을 부러트리고 망가진 팔을 자르고 가짜 팔을 달아 줄 때에는 이 꼬마의 앞날을 생각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는 막연히 실소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상대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래. 날이 아니지. 드러난 이마에 제 이마를 대었다. 꼬마의 체온은 늘 저보다 조금 높았다. 어린 동물이 으레 그러하듯이.

약속한 대로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꼬마야. 널 버리느니 죽여주겠다고 했지. 그는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너를 버릴 마음이 없다. 죽일 마음 역시 없고. 그는 문득 자신이 앞으로는 이 꼬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능청스레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집에 가자. 현아.”

마치 네 의사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듯이. 그는 상대의 휠체어를 넘어트릴 때 그러했고, 팔을 부러트릴 때 그러했고, 팔을 자르고 새 팔을 달아 줄 때 그러했듯이, 끝까지 제 멋대로 할 셈이었다. 정말 창의적인 개새끼야. 그는 속으로 생각하며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

Put your hand in my hand and we'll stand.

 








* Adele - Skyfall 가사 일부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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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Nuits de la Pleine Lune.

2016. 11. 29. 00:21 from 1차


 



 

 

 

우당탕. . . 요란한 소리가 났다. 사지 중 반이 잘리고 반이 굳은 이가 화를 내는 소리였다. 남자는 병실 문 앞에 기대어 그 소리를 들으며, 그가 화내고 있는 대상이 무엇일지, 혹은 누구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아주 의미없는 행위였다.

 

 

 


 

그가 부러트린 양 팔은 그 때까지도 기이하게 뒤틀린 채, 상대의 몸뚱이에 들러붙어 있었다. 보랏빛으로 멍들고 부은 팔은 괴이하게 자란 기생식물 같았다. 그것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어린 숙주는 처음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그 힘없고 비참한 팔을 프롤로에게 휘둘렀다. 악에 받친 소리가 났다.

- 네 새끼 때문에. 너 때문에! 안 그래도 망가진 인생 다 망가졌어, 이 씨발새끼야!

맞는 사람보다 때리는 사람이 더 아플 폭력은 때리는 이가 지쳐 울음마저 그칠 때까지 이어졌다. 프롤로는 그 뒤틀린 팔이 저를 때리고 긁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한 번도 몸을 피하지 않았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한국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의사는 겁에 질린 건지 걱정스러운 건지 모를 시선으로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지쳐버린 상대를 내버려두고, 프롤로는 수술 날짜를 잡았다. 짧은 대화가 오갔다. 네가 뭔데. 네 팔 망가트린 사람. 그는 팔 대신 인생이란 단어를 넣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지를 잃어버린 꼬마는 늘 옳은 소리를 했다. 넌 참 개 같은 새끼야. 잠에 취해 흐려지는 목소리로 뱉어낸 말마저 그랬다.

 

 

 



- 죽여 줘.

- 그러지.

그 대화는 아주 평온하게 오고갔다. 마치 내일의 아침 메뉴를 정하는 것처럼. 내일 아침은 네 죽음이야. 맛있게 먹어. 그 정도의 대화. 환지통에 신음하는 상대의 목이 잔뜩 쉬어 있었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갔다.

언제가 좋지?

지금 당장.

그건 안 돼. 날이 궂어.

그럼 내일.

퇴원은 해야지.

좁지 않은 1인실 안에서는 늘 가습기와 라디에이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가습기 옆에는 촌스러운 디자인의 달력이 걸려 있었다. 프롤로는 딱딱한 숫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는 수술 날짜를 잡을 때처럼 아주 멋대로, 날짜를 정해 불렀다. 한 달이 조금 넘게 남은 날이었다. 그 날은 날이 좋을 거야. 그는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시간은 간다. 프롤로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새 팔을 단 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따뜻한 물이 채워진 수영장과 널찍한 저택을 본 꼬마는 이런 집에서 살아보고 싶었는데, 라고 말했다.

잘 됐군. 한 달은 여기서 살게 되었으니.

그는 집이 이렇게 넓은데 왜 제 방은 내어 주지 않느냐는 항의의 말을 아주 가볍게 무시했다. 어차피 대답이 내 맘이야, 내지는 글쎄, 일 것임을 아는 상대도 길게 항의하지 않았다. 그렇게 익숙해지는 거지. 반복이란 그런 것이다.

프롤로는 종종 그들이 아주 다정한 연인인 양 굴었다. 상대를 앉힌 휠체어를 밀고 근처를 산책하고, 힘이 없는 상대의 허리를 안고 물이 따뜻한 수영장에 들어가 헤엄을 치고. 익숙지 않은 의수에 아릴 양 팔을 주물러 주다 끌어안고 잠에 들고. 그건 아주 무기질한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상냥한.

가끔은 꿈에서 깨어나라는 듯 의수를 떼어버리고. 버둥대는 단면에 입을 맞추다 여린 살을 깨물면 상대는 잇새로 소리를 깨물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벌리고 배려없이 난폭하게 아래를 헤집었다가, 금세 태도를 바꾸어 꼬마를 끌어안고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가.

입맞춤은 자주 눈물에 젖어 짜고 쓴 맛이었다. 이에 눌려 뜯긴 입술에서 질척하고 비린 맛이 났다. 비참한 맛이었다. 그 모든 걸 한데 받아 삼키고 나면 프롤로는 자주 상대를 씻기고, 보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혀 연인인 양 품에 끼고 눕곤 했다. 그러면 힘없이 늘어진 꼬마는 그를 보고,

넌 언제봐도 창의적인 개새끼야.

라고 했다.

그래, 나도 사랑해.

잠시 대답이 없었다. 으레 돌아오던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소리마저 돌아오지 않았다. 잠이 들었나. 시선을 내려 보려던 차에 느릿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래. 사랑한다.

그 즈음에 프롤로는 시선을 내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잠들어 있었다. 그는 상대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그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래. 나도.

다음 날 상대는 듣지 못한 대답을 내 놓으라며 성질을 부렸지만 프롤로는 절대 같은 말을 다시 입에 담지 않았다. 적어도 상대가 들을 수 있는 동안에는 그랬다.

무의미한 고백이 차곡차곡 쌓였다. 달이 한 번 기울었다가 차오를 때까지.

 

 

 

 


 

등 뒤에 닿은 체온이 따끈했다. 귀를 기울이면 상대의 심장이 느린 박자로 뛰고 있는 것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편히 기댄 상대의 목소리는 귀가 아닌 몸을 통해 들려왔다.

아직도 죽고 싶나?

왜 그런 걸 물어? 아니라고 할 것 같아?

그랬으면 좋겠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사이 프롤로는 감흥 없이 떨어트린 말을 주워올렸다.

달이 밝았다. 보름이었다.

 

 

 



 

바다가 가까운 절벽에서는 텁텁하고 짠 냄새가 났다. 절벽의 풀 냄새와 섞여 그건 형용하기 힘든 묘한 냄새가 되었다. 이제 됐어. 부탁해. 생의 마지막 말 치고는 아주 소박한 말이었다.

손아귀에 쥐인 목덜미가 유난히 얇다는 생각을 한다. 그건 두께의 문제가 아니었다. 체중을 실어 짓누르면 손바닥 아래서 헐떡이는 맥이 느껴진다. 벌어진 입술에는 상처가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피는 나지 않는다. 아침부터 입술을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던 모습을 생각하며 프롤로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말끔하네.

죽음의 순간은 언제나 비참하고, 처절하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한 죽음에도 예외는 없었다. 본능적으로 공기를 찾아 파득이는 목구멍에서 괴로운 소리가 났다. 허우적대는 가짜 팔이 프롤로의 팔뚝을 긁어놓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손아귀에 힘을 풀지 않았다. 흐려지는 시선이 남자의 얼굴을 향했다가, 그 옆으로 미끄러져 멀어진다. 숨이 달려 끝부터 벌개지는 눈 안에 파랗고 둥근 하늘이 담기는 것을 프롤로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파랗게 질린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마지막 숨이 새어나올 즈음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팔 위로 더욱 체중을 실으며, 그는 차가워지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자라. 꼬마야.

어린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뜨이지 않았다.

프롤로는 상대의 이마 위에 이마를 맞댄 채 천천히 목덜미를 쥔 팔을 풀었다. 희고 가는 목에는 우악스런 모양새로 보랏빛 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대로, 세 번의 심호흡을 하는 내내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면 상대가 다시 눈을 뜨고 평소처럼 욕설을 터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마침내 상대의 가슴팍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에야 프롤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멍든 목과 움직이지 않는 다리 아래로 팔을 넣어 안아올린다. 어젯 밤 업었던 것보다 조금 가벼워 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상대를 안은 채 절벽 끝으로 갔다. 파도가 제가 여기 있노라고 요란히 소리를 쳤다. 짠내가 심해졌다. 발끝을 절벽에 걸치고 선 프롤로는 품 안에 잠든 상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주 오랫동안.

상대의 몸이 절벽 아래를 날았다. 그는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담배를 하나 꺼내물었다. 한 번 길게 연기를 내뱉고, 길이가 거의 달라지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려 구둣발로 짓이긴다. 그건 모두 변덕에 의한 행위였다.

 

Blackbird singing in the dead of night,

찌르레기야, 밤의 끝에 노래를 부르며

Take these broken wings and learn to fly.

이 부러진 날개를 들고, 나는 법을 배우거라.

 

그는 낮은 소리로 흥얼거렸다. 음악도 관중도 없는 아주 짧은 곡이었다. 묘지도 상주도 없는 장례에 아주 잘 어울리는.

 

You were only waiting for this moment to be free.

너는 자유로워질 이 순간만을 그저 기다리고 있었구나.

 

 

 

 

 

 



보름달이 뜬 밤 프롤로는 끝까지 잠들지 못했다. 잠든 이를 침대에 눕히고 그 옆에 누워 끌어안은 채 초침이 가는 소리만을 세었다. 상대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는 언젠가 보았던 영화를 떠올린다.

 

보름달은 사람을 자지 못하게 만들죠.

아니에요, 나는 잠들지 못할 이유가 있었는걸요.

보름달도 그 중 하나일 겁니다.

 

보름이었다. 그를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 프롤로의 노래는 비틀즈 - Blackbird 일부를 차용,

마지막 영화의 대사 및 글의 제목은 에릭 로메르의 동명의 영화 <보름달 밤> 에서 일부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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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ㅅ신 :